NiaLab 홈으로
이야기가 마르던 밤

옛날, 아주 먼 옛날.
하늘의 별들이
지금보다 훨씬 낮게 떠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지붕 위에 앉으면 별의 숨소리가 들릴 것처럼.
그 시절, 세상의 이름은 누리였습니다.

누리의 별들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빛나는 일 말고,
좋아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거든요.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면, 사람들은 언덕에 올랐습니다.
용감한 장군의 이야기.
바다를 건너는 배의 이야기.
숲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반딧불이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낮 동안 품은 이야기를 별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별은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별빛 속에 고이 품었다가,
이윽고 형체를 주었습니다.
이야기가,
눈에 보이는 모습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장군의 이야기를 들려준 밤에는
갑옷이 별빛으로 반짝이는 장군이 태어났습니다.
배의 이야기를 들려준 밤에는
돛에 별자리가 수놓인 배가.
반딧불이 이야기를 들려준 밤에는
반딧불이를 닮은 작고 환한 것이 태어나,
길 잃은 아이들의 어깨에 앉아
길을 비춰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존재들이
들판에서, 바다에서, 마을 어귀에서 살았습니다.

누리는 이야기로 지어진 세상이었고,
이야기로 태어난 이웃들로 가득했습니다.

옛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면,
아껴 두지 말고 별에게 들려주렴.
별들은 이야기를 참 좋아한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누리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조용히.
아주 조금씩.
너무 은밀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우물가 세 번째 돌의 이름
방앗간 골목의 오래된 노랫자락
어떤 모험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
너무 작아서 사라진 줄도 몰랐습니다.

변화는 멈추지 않고 누리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차츰, 이야기를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었는지.
누구에게 들려주려 했는지.
더 이상 떠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잊혀졌습니다.
잊혀진 만큼 지워졌습니다.
이름을 잃은 들판은
봄을 불러오는 법을 잊었습니다.
노래를 잊은 바다는
성난 파도를 잠재우는 법을 잃었습니다.
이야기로 태어난 이웃들도
어느새 하나둘 희미해져 갔습니다.

별빛 장군은 마지막까지 마을 어귀를 지켰습니다.
"내 이야기를 기억해 주는 이가 하나라도 있는 한,
나는 사라지지 않아."
그렇게 말했지만···.
기억하는 이들의 살창도
하나둘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저녁, 아이 하나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별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면
친구가 태어난다는 게 정말이에요?"
할머니는 오래 말이 없다가, 창밖을 보았습니다.
"···글쎄다. 옛날에는 그랬다는데."

그리고 마침내.
굶주림에 지친 별들이 잠들기 시작했습니다.
동쪽 하늘의 큰 별이 제일 먼저 눈을 감았습니다.
별 하나가, 잠들었습니다.

서쪽 하늘의 등불별이 눈을 감았습니다.
별 둘이, 잠들었습니다.
남쪽 바다의 뱃길별이
마지막 배 한 척을 배웅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별 셋이, 잠들었습니다.

하나, 또 하나.
밤마다 하늘은 조용히 어두워졌습니다.
이제 남은 별은 하나.
하늘 끝 가장 높은 곳의 작은 별이었습니다.

작은 별은 잠들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파 온몸이 흐려져도, 눈꺼풀이 천 근이어도.
"내가 잠들면 이야기를 들을 별이 없잖아.
그러면 정말로 아무도 태어날 수 없게 되잖아."

작은 별은 기다렸습니다.
바람이 얼어붙는 밤에도.
지워짐의 안개가 언덕 밑까지 차오르는 밤에도.
기다림이 너무 길어 제 이야기마저 바닥났을 때,
별은 딱 한 문장만 남겨 두고, 밤마다 되뇌었습니다.
"누군가, 아직 이야기를 가진 이가 있다면.
부디, 이 빛이 꺼지기 전에······.“

별빛이 안간힘으로 깜빡이던 밤이었습니다.
하늘 저편에서, 다가오는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별똥별이라기엔 너무 천천히. 하지만 똑바로.
신비하게 반짝이며 다가온 그 사람은,
가슴께가 오래된 화로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였습니다.

작은 별은 마지막 힘으로
그 사람을 비추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저는, 이야기가 아주 많은 곳에서 왔습니다.”
사람은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이야기가 넘쳐서,
미처 태어나지 못한 이야기들이
사람들 가슴속에 가득 쌓여 있어요.
저도 그중 하나를 품고 왔습니다.”

작은 별의 흐린 빛이 아주 조금 떨렸습니다.
“···들려주시겠어요?”

사람은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작은 별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그리고.

별이, 타올랐습니다.
꺼져가던 작은 별이,
누리의 밤하늘 전체를 밝힐 만큼 크게.

그 빛 속에서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빛이 실이 되고, 실이 날개가 되었습니다.
날개가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갓 태어난 날개가 날아올랐습니다.
잠든 별들로 가득한 하늘을 가로질렀습니다.
날갯짓이 스칠 때마다,
별들이 하나둘 눈을 떴습니다.
밤하늘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별들이 다시 빛나게 되자
언덕에는 발걸음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별들은 다시, 조금씩 낮아졌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지붕 위에 앉으면 숨소리가 들릴 것처럼.

아주 높은 하늘 어딘가에서,
빛으로 태어난 것이 고요히 날개를 펼치고
누리의 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침